‘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 미술비평 산문집, 월간도예 기고

     

2010년 4월호 '방창현의 세계도자기행' 도자비평 산문집 연재시작

 

현대미술의 7가지 키워드와 함께 떠나는 방창현의 세계 도자 기행 

 이 글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키워드인 숭고the sublime, 몸body, 미니멀리즘minimalism, 물성materiality, 서사narrative, 개념미술conceptual art, 팝아트pop art를 중심으로 본 현대도예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형식면에서는 기행문적 수필의 형식을 빌어 독자들이 현대 도예 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 졌다. 한국의 현대도예가 오랜 동면의 시기를 지나 이제 찬란했던 옛 영화를 위한 용트림을 하는 이 시기에 한국 현대도예의 미래의 비젼과 현재의 성찰을 제시하는 글이 될 것이다. 

  

     

     

     

2. Pop Art,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를 만나다      

두 번째 작가 :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      

여행하면서 나는 줄곧 여행의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여행을 즐기면서 글을 쓴다는 처음의 순수한 의도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단계에 오게 된 것이다. 많은 인위성과 결과에 대한 집착, 그리고 내 안에 은밀히 움트는 정치적 요소들은 나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삶의 진정성을 화두로 시작한 나의 도자 기행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다. 나의 욕망을 알뜰히 파악하지 못하고 시작한 여행은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와의 조우(遭遇)에 흠짓 당황하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지식을 축적하고 글을 쓰는 욕망이 타인과의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지라는 미셜 푸코 (Michel Foucault 1926∼1984, 프랑스 철학자. 푸아티에 출생. 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여행을 목적을 가다듬는 동안 뉴욕 SOFA(The International Expositions of Sculpture Objects and Functional Art)에서 일본작가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는 쉬게키 하야쉬 Shigeki Hayashi와 함께 일본의 현대도예를 이끄는 대표적인 도예가이다. 일본의 현대도예를 이끄는 이들 신세대 작가들이 팝아트에 큰 영향을 받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겸비해서 세계도예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일본의 팝아트는 매우 독특해서 물신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팝아트와 정치적이고 체제비판적인 중국의 팝아트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일본의 팝아티스트들은 망가 Manga라고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에도 시대부터 시장 경제를 발판삼아 대중 취향의 문화의 시작을 마련한 팝아트적 성향의 우키요에(浮世繪, 부세회, Ukiyo-e, 14-19세기에 일본 서민들이 좋아하던 목판의 풍속화) 같은 지극히 일본색이 짙은 전통과 문화에 영감을 받아 작품에 반영한다. 그들은 권위적 무거움을 거부하고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의 젊은 층의 기질을 대변해서 그런지 우울하고, 반항적이고, 또한 고독하다.     

 팝아트는 오랜 수련기간을 두고 연습과 훈련을 통해 유일성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소위 고급예술의 영역에 반기를 들고, 대량생산된 키치적Kitsch 성향의 차가운 물건을 예술로 인정받은 대중 미술의 아이콘이다. 팝아트 예술가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 언급한 것처럼 팝아트는 몰개성적 반복성과 익명성, 그리고 싸구려 문화들이 풍기는 속물성을 표현하면서 엄숙한 엘리트 예술을 지양(止揚)했다. 팝아트는 모더니즘의 엘리트주의에서 생성된 계급간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예술의 본질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자유에 두었다.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서 향유될 수 있었던 예술은 고고한 미술관에서 나와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팝아트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 Claes Oldenburg는 “그렇게도 오랫동안 황금 토굴 속의 유리관 안에서 잠들어 있던 그림이 마침내 바깥으로 나와 수영을 가자고 권유받고, 담배와 맥주를 맛보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떼밀려서 넘어지고, 웃는 법을 배우며, 온갖 종류의 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라는 말로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엘리트 미술에 대한 대중미술의 승리를 자축하게 된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는 세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낼 수 없는 대중매체와 같은 너무나 많은 알레고리Allegory의 홍수 속에 놓여진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와 대량생산소비에 관한 우리들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겁고, 전통적인 재료인 도자기와 현대적인 에니메이션은 언뜻 보기에 어울리지 않지만,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유머러스하고,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그들의 실존에 관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인간의 몸에서 변종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가진 몸 위에 그려진 망가Manga들은 작가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는 주체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는 세상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광활해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많은 매체((媒體, media)와 이즘ism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각을 매체로 하는 인간의 몸만이 세상의 울림과 그 소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몸의 형태는 인간의 형상에서 변태되어 나와 원추모양에서부터 막대의 형상을 하고 있는 다양한 유기체들이다. 이 유기체들의 형태는 세상과의 관계망 속에서 배양되어 길러진 생물학적 존재성을 지니고 있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는 전후 일본 현대도예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일본의 소데이샤 Sodeisya 그룹에 영향을 받았지만, 곧 색과 형태에 있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적 문법을 구축하게 된다. 흙의 물성과 유약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과감히 수용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세계 현대 도예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도예가로서 도자의 흔적을 철저히 배제시킨 오이디푸스적Oedipus 행위는 지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전통, 권위, 남성, 백인, 이성애자)를 해체시킨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프랑스 철학자, 알제리 출생)에서 시작된 ‘탈중심화 Decentred’와 비견될 수 있는 의미있는 시도였다.     

 그는 “나의 작업은 항상 3차원의 도자형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이나, 흙 그 자체의 물리적인 느낌을 제거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형태가 아니라 언어이며, 리듬이나 흔적이며, 존재감이다‘라고 했다. 급변하는 사회의 환경과 호흡하는 예술가들의 인지능력은 지성과 감각에 의존한다. 지성은 언어적, 논리적, 분석적 성향이 강하지만, 감각은 즉흥적, 무의식적, 초자연적이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언어와 리듬, 존재감은 그의 탁월한 지성과 감각의 소산이다.     

 갤러리를 나서며 나는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내 안으로 들어오자 마자 무의식적으로 구조화되어가는 내 안의 욕망(권력의지)을 바라보며 팝아트를 다시 생각해본다. 팝아트가 진정성을 지닌 대중의 민주적인 예술인가를. 모더니즘의 권위와 권력들을 스스럼없이 무너뜨렸던 가장 대중에게 친근한 예술이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부유한 수집가나 현대식 미술관을 위한 가장 권위있는 예술의 상징자본으로 탈바꿈되었다는 사실은 팝아트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다. “팝아트 작가들이 대중을 팔아 인기 있는 부자가 됐다”라고 비판한 미술 비평가들의 말은 차치하더라도, 최근 팝아트의 인기는 상업적인 화랑들의 팝아트의 본질을 벗어난 돈벌이용 도구로 전락한 면을 간과할 수 없다.     

 모더니즘이라는 아버지의 권위와 위선에 도전하던 팝아트, 아버지가 물려준 권력을 향한 편집적 욕망을 지닌 ‘타자(他者)’라는 현상학적 유전자는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가장한 대중예술로 다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독재를 꿈꾸게 했는지 모른다. 도대체 대중을 위한, 대중에 의한, 혹은 대중의 예술이란 것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인류에 심어주었던 가장 큰 신화였던 ‘대중을 위한 계급 없는 사회’ 의 구현은 예술에서도 그 구조적 모순을 들어낸다. 그래서 팝아트는 씁쓸하고, 모순되고, 때론 섬뜩하다. 내 안의 낯선 타자(他者)를 다시 조우하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저 먼 초원을 달리는 유목민들의 말발굽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들려온다.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낯선 대륙을 달리는 타자(他者)들, 잡힐 듯 다시 사라지는 그들의 존재감은 인간이라는 슬픈 종족이 함께 지녀야 할 숙명인가 보다.     

 타카쉬 히노다 Takashi Hinoda는 1991년 일본 오사카 미술대학(Osaka University of Arts)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현재는 쿄토 사가 미술대학(Kyoto Saga University of Arts)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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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숭고, 시원의 감흥   

    

 

 여행이 시작되는 곳    

    

 뉴욕의 햇살은 서울보다 따갑다. 오래된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사선으로 흘러들어오는 햇살은 이방인에게는 시리도록 아프다. 영혼은 고향에 두고 텅 빈 거죽만 이 낯선 곳으로 데려온 느낌이다. 정돈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쏟아져 흩어진다.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분주히 달리는 사람들 속에 나는 평생 길 위에 던져진 유목민의 여정을 그려본다. 그 자유로움 속에 닫혀진 내 몸과 열린 세계 사이에 이물질처럼 밀려드는 이 생경한 두려움. 나의 도자 기행은 이 세계가 내 몸에 밀어내는 낯선 감각들을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될 것이다.     

 뉴욕 챌시에서 1시간 30분 떨어진 곳엔 뉴팔츠(New Paltz)라는 작은 타운이 있고, 그곳에서 나의 도자 기행이 시작된다.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지닌 곳, 밤이면 허드슨 강이 흐르고, 아침이면 사슴 가족이 물을 마시러 오는 곳, 서울보다 잠이 더 잘 오는 그 곳은, 도착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나의 몸과 마음을 동화시킨다. 대자연, 그 곳에선 어쩌면 죽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다.     

 첫 번째 작가, 빈 피네런(Bean Finneran)     

 “성스러운 삼림 중에서 홰나무와 그 고독한 그림자는 숭고이다. 화단이나 낮게 깔려 있는 나무 수풀은 아름답다. 밤은 숭고하고 낮은 아름답다. 숭고는 감동시키고 미는 매혹시킨다”(칸트, 미와 숭고, 1764).     

 빈 피네런(Bean Finneran)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났고,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있는 해수 소택지(salt marsh, 조수가 드나드는 해안의 늪) 끝자락에 있는 고립된 지역에 산다. 그곳은 그녀가 도시의 문명을 떠나 대자연의 품에서 초시간적 혹은 탈공간적인 자연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성지인 곳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대자연의 기를 받고, 그 아우라(aura)를 고스란히 갤러리의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그녀의 작품은 나뭇가지를 재현한 흙으로 만든 코일을 수백, 수천 겹으로 배열해 단순한 자연의 모방처럼 보이지만, 작품 속의 코일은 유기적 유니트(organic unit)로써 추상화 되어 있고, 가마 속의 소성 과정(firing process)에서 임의적인 변형 과정을 거친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빈 피네런이 현현(顯現, manifestation)하고자 하는 자연의 숭고미를 위한 하나의 제의적(祭儀的, epideictic) 과정으로 초월적 대상과 관객을 이어주는 샤머니즘(shamanism)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울창한 나무숲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작품들은 정지된 공간에서 나와 마치 갤러리를 부유하듯 형형색색으로 물들이고, 보이지 않는 지하와 인간이 사는 대지, 그리고 천상을 이어주며 그들의 현존성을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부각시킨다. 빈 피네런Bean Finneran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 존재와 부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오롯이 대자연의 현전 앞에서 모든 언어를 침묵케 만들고, 내안의 진화를 거부하는 시원의 숲과 대면하게 한다. 그것은 삶의 저편에 자리한 풍경이 아니라, 대상과 내가 하나의 등가물(等價物)로서 한번도 태양의 양기를 경험하지 못한 숲 속의 처녀지(處女地, virgin soil)와 제 이름을 찾지 못한 원시의 침엽수림이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축제 혹은 향연의 장이다. 감각, 오로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감각만이 이 향연에 초대된다. 인간이라는 문명과 이성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이 소우주의 육질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경계와 구획을 꿰뚫고 나아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들뢰즈(Gilles Deleuze)의 유목적 사유를 힘껏 들이켜야 한다.     

 빈 피네런 Bean Finneran의 작품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것은 나의 물리적 왜소함이 아니라, 숙명적인 인간의 근심, 불안, 욕망 그리고 내 무의식 속에 침잠되었던 트라우마(心的外傷, psychic trauma)가 마치 넉넉한 대자연의 품안에서 치유를 받는 느낌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을까? 내가 미국에서 본 풍경들은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모순이 투영된 본질과는 다른 너무나 생경한 모습이었고,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작품 앞에서 지난 날의 기억의 편린(片鱗)들이 저 캄브리아계 지층 속으로 퇴적되어 아득히 사라진다.     

 빈 피네런Bean Finneran은 주술사다. 그 아득한 시대의 숲과 땅의 울음소리가 멈추자 갤러리 안은 이미 태고의 숲에서 나온 정령들로 가득하다. 내 몸의 세포들은 각기 다른 소리와 몸짓으로 정령들과 교감을 한다. 그녀가 불러낸 정령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무언가 낯선 감각이 내 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갤러리 밖은 낮은 발코니가 있는 이국적인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건물 앞 뜰엔 화씨 90도가 넘는 태양 아래 웃옷을 벗은 여학생들이 선텐에 여념이 없다. 햇살 아래 부서지는 미소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의 가슴 실루엣을 무디게 감추고 있던 작고 하얀 손을 아쉽게 뒤로하고 나는 다시 발길을 옮긴다. 잠시 머물다 갈 청춘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욕정, 죽어가는 우리의 육신, 그리고 다시 대자연의 품. 갤러리를 나오면서 이런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빈 피네런(Bean Finneran)은 미국 메사츄세츠 예술대학(Massachusetts College of Arts) 을 졸업했고, 지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업작가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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